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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팝나무

"수령이 된 자는 백성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정신을 가장 잘 담은 한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깊은 사색과 폭넓은 독서로 18년의 유배 기간을 포함하여 평생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선생은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였는데, 그의 저서는 정치, 경제, 행정, 법학, 의학, 지리,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유배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는 복(福)이었습니다. 파당(派黨)과 탐관(貪官)이 득세하던 중앙 정치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우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을 통해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참혹한 삶과 관리들의 비리, 폭정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유배 중이라 현실 정치와 행정에 바로 실행할 수 없었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쓴다.' 는 뜻으로 '심서(心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 유배 생활 동안 조밥으로 대표되는 거친 밥과 나물로 연명하며 백성들과 삶을 함께하였고, 청빈한 삶을 몸소 배웠습니다. 선생의 여러 저서에서 "수령은 백성의 굶주림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 자신이 조밥으로 버텨낸 긴 세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당호(堂號)를 제목으로 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그의 수필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 곳곳에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생생하게 담겨 있으며, 조밥과 나물로 이어가는 일상의 모습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체험에서도 알 수 있듯, 조밥은 빈한(貧寒)한 삶의 표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조밥에 된장국'은 청빈한 선비나 가난한 백성의 식사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조는 척박한 땅, 가뭄이 드는 땅, 버려진 땅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꿋꿋이 자라는 곡물로, 우리 민족의 가난과 질긴 생명력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곡물이 바로 조, 조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라난 안동의 산골도 논보다 밭이 많은 곳이었기에, 겨울에서 봄철까지는 늘 쌀밥보다 조밥이 주식이었고, 그나마도 넉넉히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갓 지은 조밥은 그래도 먹을 만하였지만, 식은 조밥은 덩어리가 져서 거칠고 딱딱하며 맛도 없었습니다.
조는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벼과의 한해살이풀입니다. 잡초인 강아지풀을 길들여 개량한 것이라 생명력이 매우 강합니다. 보통 기장과 조를 합하여 '서속(黍粟)'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는 지금도 조를 '서숙'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서숙'으로 알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에는 메조와 찰기가 있는 차조가 있으며, 밥으로 먹기에는 차조가 훨씬 좋습니다. 차조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기장이 있는데, 기장의 낱알이 조보다 다소 큽니다.
이 조밥을 닮았다고 하여 '조팝나무'로 불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조밥나무'가 경음화되면서 '조팝나무'가 된 것입니다. 하얀 이밥(쌀밥)을 닮았다고 하여 '이밥나무'가 '이팝나무'가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밥은 노란색인데 조팝나무 꽃은 하얀색이라 의아하게 여길 수 있지만, 좁쌀로 튀밥을 만들면 하얀 조팝나무 꽃 모양과 닮아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먹는 '밥'과 관련된 이름을 지닌 나무들을 보면, 조팝나무는 보통 4월 중순에, 이보다 조금 늦은 5월 초순에는 이팝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이 시기는 예전 농촌에서 이른바 보릿고개로, 농사일은 고된데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때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조팝나무와 이팝나무의 하얀 꽃에는, 밥을 배불리 먹고 싶었던 옛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날아온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 오고……
조선 후기 소설 『토끼전』에서, 별주부가 토끼의 꾐에 빠져 육지로 올라왔을 때 한창 무르익어 가는 봄 풍경을 둘러보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대목입니다.

별주부가 육지로 올라온 시기는 4월 초·중순으로 보이며, 올라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꽃이 조팝나무 꽃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 땅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기 때문입니다. 조팝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봄이면 우리 산하(山河)의 양지바른 야산 자락과 논밭 두렁을 하얗게 수놓는 대표적인 꽃나무입니다.
조팝나무는 언뜻 먼 친척처럼 여겨지지만 장미과에 속합니다. 봄에 피는 매화, 복숭아, 살구, 앵두, 벚꽃, 사과, 배, 모과 등과 같은 집안입니다. 키는 2m 정도까지 자라는 활엽 낙엽 관목으로, 장미과 특유의 다섯 장 꽃잎을 가지고 있으며, 9월에 씨가 익습니다.
조팝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공기 오염에도 잘 견디며 어디서나 잘 자라는 데다, 봄이면 예쁜 꽃을 피워 공원 등의 조경수나 관상수로 많이 심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생 울타리나 도로변 조경수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20여 종이 존재하는데, 그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진분홍색 꽃이 피는 꼬리조팝나무, 잎이 둥글고 꽃이 그릇에 소복이 담긴 듯 보이는 산조팝나무가 있으며, 당조팝나무, 공조팝나무, 좀조팝나무, 일본조팝나무, 삼색조팝나무 등도 있습니다.

조팝나무의 중국명은 수선국(繡線菊)으로, '수선'이라는 여자아이와 아버지에 얽힌 전설이 담긴 이름입니다. 일본에서는 버들잎 모양의 잎에 꽃이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 하여 '눈버들(雪柳, ゆきやなぎ)'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Bridal wreath', 즉 신부의 화환 또는 결혼식의 화환이라는 뜻입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조팝나무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蜀漆)이라고 하며, "맛은 쓰고 매우며 독이 약하게 있다. 학질(말라리아)을 낫게 하고 가래를 잘 배출하게 하며, 열이 오를 때 해열제로 효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스피린(Aspirin)'은 해열·소염·진통제이자 혈전 예방약입니다. 살리실산(Salicylic acid)이라는 물질에서 유래하는데, 살리실산은 버드나무 껍질에 많이 함유되어 있어 주로 버드나무에서 추출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조팝나무 종류에도 살리실산이 널리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조팝나무는 약한 독성이 있다고 하지만, 봄에 돋아나는 어린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습니다. 또 하얀 꽃이 소박하고 아름다워 꽃꽂이 재료로도 많이 쓰이며, 향기롭고 꿀이 풍부하여 꿀벌이 즐겨 찾는 밀원식물이기도 합니다.
조팝나무 꽃으로는 꽃차를 만들어 즐길 수도 있습니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줄기를 훑어 따서 살짝 찐 다음, 그늘에 말려 두면 훌륭한 차(茶)가 됩니다.
(2026. 04 — 국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