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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이른바 세 영웅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일본의 에도(江戶) 후기 수필가 ‘마쓰라 세이잔(松浦靜山)’ 이 1822년부터 20년에 걸쳐 쓴 수필집 『갑자야화(甲子夜話)』에 나오는 이야기로, 오늘날 경영학의 조직 관리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울게 만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일본 통일의 최후 승자는 '기다림의 미학' 을 택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고 하던 회사에 입사한 1984년은, 일본 경제가 전후(戰後)의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 자본이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뉴욕의 록펠러 센터, 페블비치 골프장 등,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동산을 연이어 사들이자, 미국에서는 이를 "제2의 진주만 기습"이라 부르며 격렬하게 경계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대기업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배우자, 일본을 알자"가 범사회적 슬로건이 되었고, 그 필독서로 떠오른 것이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역사소설 『대망(大望)』이었습니다. 원작은 총 26권으로, 일본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출간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원대한 꿈과 야망'이라는 뜻의『대망』으로 번역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등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두견새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일본의 와카(和歌)나 하이쿠에서 ‘등나무꽃’ 과 ‘두견새’ 는 거의 단짝처럼 함께 나옵니다.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등나무 꽃의 모양은 어쩐지 슬프고 그리운 느낌을 줍니다. 거기에 꽃이 필 무렵, 밤늦도록 애처롭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가 더해지면 그 슬픈 분위기는 한껏 고조됩니다. 등나무 꽃이 눈으로 보는 슬픔이라면, 두견새는 귀로 듣는 슬픔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골 마을에서, 등꽃이 피어나고, 송홧가루 날리는 봄밤이면 늘 소쩍새(두견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체구에서 두, 세 시간 밤에 골짜기를 울릴 정도로 ‘소쩍 소쩍’ 처량하게 울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목소리에는 분명 한(恨)이 있고, 슬픔이 묻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보랏빛 꽃송이마다
   그리움이 고여 있는가
   등나무 그늘 아래 서면
   잊혀진 얼굴들이 꽃비 되어 내린다.

박화목 시인의 「등나무 아래서」입니다.

등나무 꽃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떨어지는 눈물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고개 숙인 슬픔과 덧없이 지는 청춘, 향기만큼이나 깊은 사랑의 아픔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등나무 꽃은 좋은  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민속놀이가 된 화투(花鬪)를 보면, 4월패를 흔히 '흑싸리'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등나무 꽃이 늘어진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그 열 끗 패에 함께 그려진 새가 바로 ‘두견새’입니다. 등나무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두견새가 따라오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방자치제 이후 우리 주변 곳곳에 작은 공원과 쉼터가 생겨나면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등나무도 부쩍 많이 심기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연보랏빛 꽃송이가 하늘에서 쏟아지듯 피어나고, 가끔은 흰색 등나무 꽃도 눈에 띄어 소박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에 따르면, 일본인이 좋아하는 꽃은 모란이나 부용, 연꽃 같이 크고 화려한 꽃이 아니라, 등나무, 싸리꽃, 벚꽃처럼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치밀하게 모여 피는 군집성 꽃들입니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축소 지향적' 미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일본 성씨에는 등나무 등(藤)자가 유난히 많습니다. 이토(伊藤), 가토(加藤), 사토(佐藤), 후지와라(藤原), 후지무라(藤村), 후지이(藤井) 등이 그 예입니다.

반면, 우리 선비들은 등나무가 스스로 서지 못하고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특성을 소인배의 처신에 비유하여 멸시하였기에, 조선 시문에서 등나무 꽃이 소재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등나무는 의지할 것이 없으면 땅 위로 뿌리를 드러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다가, 기댈 것을 만나면 단번에 감고 올라갑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왼쪽으로 감아 오르는 칡[葛]과 오른쪽으로 감아 오르는 등나무[藤]가 서로 얽히면 풀어낼 실마리를 찾기가 어렵다는 데서 나온 표현입니다.

등나무의 원산지는 문헌에 따라 한국 또는 중국으로 달리 기술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편찬한 『전설의 조선』에는, 백두산에서 자라던 한 넝쿨식물이 두 갈래로 뻗어 만주 쪽으로 간 것은 등나무가 되고 조선으로 내려온 것은 칡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한국식물생태보감』에 의하면 등(藤) 자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로 '실타래처럼 얽힌 식물의 줄기'를 뜻합니다. 

식물학적으로 등나무는 덩굴성 목본식물로 콩과(豆科)에 속하며, 뿌리의 질소 고정 능력 덕분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속리산 이남 남부 지역과 제주도에 많이 야생하며, 서울 등 중부 지역의 쉼터에 있는 등나무는 대부분 식재한 것입니다. 절개지나 고속도로 비탈면에도 흙을 잡아주는 사방(砂防)식물로 많이 활용됩니다.

등나무의 새순인 등채(藤菜)는 삶아 나물로 무쳐 먹었고, 줄기는 지팡이, 바구니 등 생활 도구로, 껍질은 한지 원료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부산 범어사 앞의 등나무 군락은 스님들이 종이 원료로 쓰기 위해 오랫동안 가꾸고 보호한 덕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등나무는 한방에서 뿌리, 줄기, 꽃을 약재로 사용합니다.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거나 평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등나무를 달여 먹으면 통증을 완화하고 위장 질환 개선에 좋다고 하며, 봄에 피는 꽃은 등화(藤花)라 하여 차로 마시거나 술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등나무는 껍질이 질기고 속이 유연하면서도 단단하여, 동양에서는 이를 이용한 등공예(藤工藝)가 매우 발달했습니다. 의자, 바구니, 상자, 채반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불구불한 모양새와 단단함 덕분에 노인들이 사용하는 멋스러운 지팡이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또 줄기의 섬유가 질겨 등지(藤紙)라는 종이로 만들기도 했는데, 닥종이보다 질기고 수명이 길어 중요한 문서나 경전을 기록하는 데 쓰였습니다.

중국 『삼국지』에도 등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갈량이 남만(南蠻)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마지막 싸움에서, 맹획의 원군인 오과국의 등갑군(藤甲軍)에게 크게 고전합니다. 등갑은 등나무를 말려 기름에 절인 갑옷으로, 가볍고 물에 뜨면서도 화살을 막아낼 만큼 단단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 '등나무'는 남방산 라탄(Rattan)으로, 우리가 흔히 보는 등나무와는 다른 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등나무 꽃은 지방에 따라 보통 4월 말에서 5월 초에 보랏빛으로 피어나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냅니다. 등나무로 유명한 곳으로는 부산 범어사 앞 계곡을 따라 약 6,500그루의 등나무가 자라는 '등운곡(藤雲谷)'이 으뜸입니다. 만개했을 때는 보라색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176호입니다. 그 밖에도 무주 등나무 공설운동장, 남원 서도역의 등나무 터널, 당진 합덕초등학교, 밀양댐 생태공원, 경주 금장대 습지공원 등이 유명합니다.

(2026. 05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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