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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

5월이 되었습니다.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이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노천명 시인(1912~1957)의 시 「푸른 오월」의 첫 부분입니다.
계절이나 특정 달을 수식하는 관용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계절로는 가을을 가리키는 말이 가장 많아서 '결실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사랑의 계절', '독서의 계절' 등이 있습니다. 달(月)을 수식하는 말로는 5월이 단연 으뜸이어서 '푸른 오월', '신록의 계절', '가정의 달', '계절의 여왕' 등으로 불립니다. T. S. 엘리엇이 '잔인한 달'이라 했던 4월을 어휘적으로 보상이라도 하듯, 5월은 온통 푸름과 희망과 약동으로 가득합니다.
근래에 더욱 강조되는 5월의 수식어는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고,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부부의 날까지 있어서입니다. 그 반대어들이 난무하는 세태에서, 5월만이라도, 아니 그 하루만이라도 '감사와 존경', '신뢰와 사랑'을 생각하고 표현하자는 강조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가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회(社會)입니다. 굳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도 건강하고 나라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정과 가족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지만, 가까이 있고 늘 거기에 있으며 한결같다는 생각 때문에, 또 먹고사는 문제와 사회생활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가정의 소중함은 '좀 더 잘되면', '시간 여유가 생기면'이라며 내일로 미루어지기 일쑤입니다.
살 만큼 살아야 비로소 체득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여정에서 가정과 가족을 소홀히 해 왔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믿고 신뢰해 준 아내에게는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아들들에게는 그때그때 함께 놀아 주고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빈자리가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아빠로서 미처 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넉넉히 베풀고 싶습니다. 예로부터 조부모가 손자 손녀와 함께하며 가르치는 '격대교육(隔代敎育)'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런 반성과 후회는 비단 오늘날만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친부모님과 처부모님 네 분이 모두 작고(作故)하셔서, 어버이날이 다가와도 제 손으로 카네이션을 달아 드릴 분이 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리움과 함께 막연한 죄송함, 그리고 가슴 저미는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어버이날 부모님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Carnation)을 달아 드리는 유래는 미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07년, 안나 자비스(Anna Jarvis)라는 미국 여성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하얀 카네이션을 교회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미 의회가 매년 5월 둘째 주일(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현재 169개국에서 어머니날(어버이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지정하였고, 1973년 정부가 '어버이날'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카네이션(Carnation)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에서 화관(花冠)을 만들 때 사용했기 때문에 대관식을 의미하는 'Coronation'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카네이션은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원예용으로 재배된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1925년 일본을 통해 도입되었습니다. 장미, 국화, 튤립과 함께 세계 4대 절화(切花)로 꼽히며, 상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꽃입니다.
카네이션은 석죽과(石竹科) 여러해살이 초본(草本)으로, 키는 40~50cm 정도이며, 줄기에 흰 가루가 묻은 듯한 분백색(粉白色)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본래 꽃은 7~8월에 피지만, 온실에서 개화시기를 조절하여 카네이션의 최고 소비 시기인 5월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 맞추어 출하하고 있습니다.
카네이션(Carnation)의 학명은 Dianthus caryophyllus입니다. '디안투스'는 그리스어로 신(Dios)과 꽃(Anthos)의 합성어로, '신의 꽃'이라는 뜻입니다. 카네이션은 남유럽이나 서아시아 지역에서 자생하던 야생 패랭이꽃을 시원종(始源種)으로 삼아 교배·개량한 원예종입니다. 즉 카네이션은 덩치를 키우고 화려해진 패랭이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패랭이꽃은 5~6월이면 시골 오솔길이나 산모퉁이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한 이 꽃의 이름은, 꽃받침 모양이 조선시대 보부상이나 역졸(驛卒) 같은 평민들이 쓰던 갓, 즉 댓개비(조릿대 혹은 신우대)로 엮은 '패랭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습니다.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1489)』과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에서는 중국명 석죽화(石竹花)를 음독(音讀)하여 '셕듁화'로 불렀으며, '패랭이꽃'이라는 한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유희(柳僖)가 편찬한 『물명고(物名攷)』부터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륙성 패랭이꽃보다 해양성 술패랭이꽃이 더 흔하게 분포합니다. 이어령 선생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에도 소개되듯,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을꽃 일곱 가지(秋七草) 중 하나로, 일본어로는 나데시코(撫子)라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기도 가련한 꽃'이라 표현하며, '가장 일본다운 여성', 즉 '요조숙녀(窈窕淑女)'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일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 '나데시코 재팬'도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잡코리아가 직장인 7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5월 가정의 달 평균 지출은 약 54만 원으로, 그중 어버이날이 27만 원으로 가장 많고, 어린이날이 13만 원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어버이날 선물로는 현금이 7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 수치를 보면서 신동엽 시인(1930~1969)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문득 떠오릅니다. 본래 껍데기는 내용을 담기 위해 생겨났건만, 어느 순간부터 내용보다 껍데기가 화려해지고, 마침내 껍데기만 남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정작 어려운 살림에 의무처럼 지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날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만 남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선물과 현금이라는 껍데기보다, 감사와 존경, 신뢰와 사랑이라는 마음의 내용을 날마다 주고받을 수 있다면, 굳이 달력에 표시된 그 하루가 아니어도 매일 어버이날이고 매일 스승의 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26. 05 - 국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