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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

봄부터 여름까지 넓고 시원한 잎을 자랑하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며, 겨울에는 잎이 진 자리에 조롱조롱 열매방울을 매달고 있는 나무, 줄기마저 우리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을 연상시키는 얼룩무늬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나무, '플라타너스'가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행단(杏亶)'이라 하여, 은행나무(銀杏) 아래였다고도 하고 혹자는 살구나무(杏) 아래였다고도 말합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기원전 370)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도,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8)이 제자들과 토론을 벌였던 아카데미의 그늘도 바로 플라타너스 아래였습니다.
플라타너스(Platanus)와 플라톤(Platon), 나무 이름과 철학자의 이름이 닮아 있는 것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이 덕(德)의 형용사로 즐겨 쓰던 말이 바로 '넓음'이었는데, 그리스어 '플라튀스(Platys)'는 '넓다'는 뜻이고, 플라타너스는 '잎이 넓은 나무'라는 의미입니다. 플라톤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였으나,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뜻의 플라톤이라는 별명이 그의 이름처럼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플라타너스 아래가 배움과 가르침의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저에게도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배움의 소중한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안동 서후초등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는 가지가 서로 맞닿을 만큼 나란히 선 커다란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있었고, 그 사이에 콘크리트로 책상과 긴 의자를 만들어 '임간교실(林間敎室)'이라 불렀습니다. 나무숲 사이의 교실이라는 뜻 그대로였습니다.

어느덧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넓은 플라타너스 잎 그늘 아래 그 시원한 임간교실에서 공부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가을 운동회 때에는 국기게양대에서 뻗어나간 만국기 줄을 하나씩 받쳐주는 것도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던 플라타너스 가지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모교 교정을 다시 찾았을 때, 임간교실도 플라타너스도, 그루터기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가슴 한켠이 허전해졌습니다. 추억의 큰 부분이 지워진 것 같아 아쉬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플라타너스는 일제강점기에 북미에서 들여온 나무로, 처음 지어지던 초등학교 교정마다 어김없이 심겼습니다. 그래서 꿈 많던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우리 연배들은 이 나무와 함께 자랐고, 저마다 플라타너스에 얽힌 추억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붙여진 공식 이름은 '양버즘나무'입니다. 나무가 굵어지면서 표피가 터져 벗겨지는 줄기의 모습이, 그 시절 어린아이들의 빡빡 깎은 머리에 마른버짐(버즘)이 얼룩덜룩 피어나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서양인들은 잎을 보고 '넓음'을 떠올렸는데, 우리는 줄기를 보고 피부병인 '버즘'을 떠올린 것입니다.
플라타너스는 낙엽 활엽 교목으로 수세가 강하며, 키는 30m 정도로 크고 둘레는 아름드리 이상으로 자랍니다. 잎의 크기가 20~25cm에 달해 녹음수로서 효과가 매우 큰 나무입니다.

플라타너스 종류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열매방울이 한 개씩 달리는 북미 원산의 양버즘나무, 동유럽과 서아시아 원산으로 열매방울이 여러 개 뭉쳐 달리는 버즘나무, 그리고 양버즘나무와 버즘나무를 교배하여 공해와 병충해에 강하게 만든, 열매방울이 두 개씩 달리는 단풍잎버즘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로수는 주로 양버즘나무이고,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는 대부분 단풍잎버즘나무입니다.
플라타너스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5월에 소박하고 예쁜 꽃이 피고, 10월이면 탁구공만 한 크기의 열매가 대롱대롱 달려 이듬해 봄까지 가지를 장식합니다. 겨울과 봄 사이 이 열매가 말라 터지면 털 같은 것이 바람에 날리는데, 사람에 따라 눈이나 호흡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번식은 씨를 뿌리거나 봄에 꺾꽂이(삽목)를 해도 잘 됩니다.
근래에는 우리나라 중생대 백악기 지층에서 은행나무와 함께 플라타너스 화석이 발견되고 있어, 우리나라가 플라타너스의 원산지 중 하나라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근거가 생기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Platanus)의 영어이름은 '플레인트리(Plane tree)' 인데, 역시 '넓고 편평한 나무'라는 뜻으로 학명인 그리스어 ‘넓다(Platys)’ 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중국에서는 '법동(法桐)'이라 하여 '프랑스 오동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고, '영현(鈴懸)'이라고도 하는데, 방울 령(鈴)에 매달 현(懸)자를 써서 열매가 방울처럼 달린 모양에서 지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일본어로는 '스즈카케노키(すずかけのき, 鈴懸の木)'라 하는데, 이 역시 한자 '영현'을 일본어로 읽은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낙엽이 진 겨울, 가느다란 끈에 방울처럼 매달린 동그란 열매의 모습을 보고 '방울나무'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플라타너스는 빨리 자라는 특성과 병충해·공해에 강하다는 이유로 가로수로 널리 심겼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런던이나 파리 등 외국에서도 가장 많이 심긴 가로수 중 하나가 바로 플라타너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가로수뿐 아니라 학교 교정이나 공원 주변에 플라타너스가 많이 심긴 데에는, 일제강점기 초기 시각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했던, 전시행정의 필요에 따라, 빠른 녹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플라타너스 식재를 권장하기 위해 이 나무를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하여 '녹음수(綠陰樹)'라 불렀고, 토양을 정화하는 나무라 하여 '정토수(淨土樹)'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로수로 적합한 나무는 수형(樹型)이나 꽃, 단풍 중 어느 하나라도 아름다워야 하고, 도시 공해와 병충해에 강해야 하며, 온도 변화에도 적응력이 좋아야 합니다. 뿌리가 보도블록을 들어 올리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플라타너스는 공해에 강해 도심에서도 잘 자라고, 생장이 빠르며, 수형도 단정하고, 가을 주황색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넓은 잎이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다른 어떤 나무보다 뛰어나고, 소음을 흡수하는 방음 효과도 있어 오래전부터 가로수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또한 무성한 잎으로 짙은 그늘을 만들어 도시열섬 저감효과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2008년 8월 25일 오후 3시 기준으로 을지로 소나무길 지표면 온도가 38.1℃였던 반면, 바로 옆 플라타너스 길의 지표면은 29.3℃로 측정되어 무려 약 9℃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경부고속도로 청주 IC에서 청주 시내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한때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터널이 있었습니다. 그 길은 청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맑은 고을 청주(淸州)'라는 이름에 걸맞은 첫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동안 가로수로 사랑을 받아왔던 플라타너스가 200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가로수로 심지 않고 있으며, 기존의 것들도 점차 다른 수종으로 교체되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 열매의 털이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는 데다, 세월이 흐르면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의 가지가 지나치게 넓게 뻗어 신호등과 이정표를 가리고 인근 상가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시군구청에서는 매년 가을과 겨울에 마치 닭발을 세워 놓은 듯 삭막한 모양으로 가지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또한 뿌리가 얕아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를 불룩하게 들어올리고, 태풍이 오면 쉽게 쓰러져 2차 피해를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가로수의 풍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때 가로수의 대명사였던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느티나무는 점차 줄어들고, 대신 벚나무, 이팝나무, 마로니에, 회화나무,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으로 또 고급 수종(樹種)으로 교체되며 가로수의 면면도 한층 다채로워지고 있습니다.
2026. 06. - 국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