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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


한국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1980~1990년대, 우리의 전자산업은 좋은 기술과 소재, 부품과 장비를 '전자 왕국' 일본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전자회사에서 수입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의 대부분이 일본과 연결되어 있어,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학창시절엔 배우지 않았던 일본어를 책을 보고 테이프를 들어가며 열심히 공부해야 했습니다. 

일본은 예로부터 고유의 말은 있었지만 문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5~6세기경 백제(百濟) 등을 통해 한자(漢字)가 전래되면서, 일본인들은 한자를 빌려 자신들의 말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한자를 정자로 쓰기에는 무척 불편했기에, 이를 흘려 쓰는 초서체에서 ‘히라가나’를 만들고 한자의 일부분을 따와 ‘가타카나’를 만들며 고유의 문자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어는 우리와 어순이 같아 처음에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어느 언어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역사적 배경 탓에 지금도 한자를 많이 쓰는데, 한자를 읽는 방법이 음으로 읽는 ‘음독(音讀)’과 뜻으로 읽는 ‘훈독(訓讀)’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이 훈독이 제 기준에서는 참 변화무쌍합니다.

예를 들어 한자의 '새 신(新)' 자를 일본인들이 읽는 방법은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신, 니이, 아타라, 아라, 사라, 시라' 등 여섯 가지나 됩니다. 문맥에 따라 이 여섯 가지 발음을 적절하게 골라 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일본에 문화와 문자, 종교, 정치 등을 가장 많이 전해준 나라는 삼국시대의 백제(百濟)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는 백제의 일본어 발음은 ‘하쿠사이’이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백제를 ‘쿠다라’라고 읽어왔습니다. 왜 백제라고 쓰고 쿠다라라고 읽느냐고 물어보아도, 일본인들 역시 그저 “원래 그렇게 읽는다”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백제가 왜 ‘쿠다라’로 발음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혹자는 백제 사비성(부여)의 관문이었던 ‘구드레 나루터’에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 언어학계의 보편적인 설명은 고대 한국어에서 ‘크다’의 어간이 일본으로 건너가 ‘구/쿠’가 되었고, 나라를 뜻하는 ‘나라/다라’가 합쳐졌다는 견해입니다. 즉, 선진 문물을 전해준 ‘위대하고 큰 나라’라는 경칭의 의미가 담겼다는 해석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어에는 ‘시시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뜻의 ‘쿠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백제의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 되어, 당시 일본에서 백제 물건이 최고 명품 대접을 받았기에 ‘백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흥미로운 속설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말이 일본어에 남긴 흔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일본 고대 국가의 발상지인 ‘나라(奈良)’현의 지명은 우리말 ‘나라’에서 왔고, 날씨가 흐릴 때 쓰는 ‘꾸물꾸물’은 일본어 ‘구모리(曇り, 흐림)’가 되었습니다. 위를 뜻하는 ‘우에(上)’는 우리말 '위'와 닮았고, 수레가 구르는 모습에서 자동차를 뜻하는 ‘구루마(車)’가 나왔으며, ‘마을’은 ‘무라(村)’가 되었습니다. 자음 받침 발음이 어려운 특성 때문에 ‘섬’은 ‘시마’, ‘곰’은 ‘구마’, ‘더덕’은 ‘도도쿠’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말이 일본어의 뿌리에 미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안동에서는 고조부까지 4대 봉사(奉祀)로,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정성껏 지냈습니다. 제상에 밥을 올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메를 가져오라” 하셨고, 어머니는 갓 지은 쌀밥을 퍼 오셨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왜 밥을 메라고 할까?’ 늘 의문이었습니다. 훗날 일본어를 배우면서 아버지가 쓰시던 ‘메’가 쌀을 뜻하는 일본어 ‘코메(米)’나 ‘오코메(御米)’에서 온,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아닐까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일 비교언어학계에 따르면, 우리 고대어에서 쌀과 밥을 뜻하던 ‘메’라는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의 쌀(코메)이 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고대 언어에서 찰기가 있는 쌀은 ‘찹쌀’, 일반 쌀은 ‘멥쌀’이라 불렀습니다.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헌을 보면 ‘멥쌀’은 ‘메+ㅅ+쌀’ 형태로 적혀 있어, ‘메’ 자체가 이미 쌀과 밥을 뜻하는 독립된 단어였음을 증명합니다. 국어사전에도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 또는 ‘궁중에서 밥을 이르는 말’로 엄연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제사상 앞에서 경건하게 부르시던 ‘메’는, 수천 년 전 이 땅에서 벼를 재배하던 우리 조상들의 언어이자 바다 건너 일본에 전해준 뿌리 깊은 우리 고유어였던 셈입니다.

 


‘메꽃’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아가는 과정은, 여느 식물의 이름을 찾는 서사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의 치열한 삶과 역사의 숨결을 마주하며 깊은 울림을 느꼈기에 도입부가 이토록 길어졌습니다.

여름의 초입, 햇볕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시골길이나 도심의 둔덕, 강가와 공원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팔꽃을 빼닮았지만 한결 수줍은 분홍빛을 지닌 꽃, 바로 ‘메꽃’입니다.

나팔꽃이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이슬이 마르면 이내 시들어 버리는 것과 달리, 메꽃은 아침에 피어나 한낮의 강렬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저녁에야 느긋하게 시듭니다. 한여름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이 매력적인 야생화입니다.

메꽃은 나팔꽃, 고구마, 새삼 등과 함께 ‘메꽃과’에 속합니다. 이맘때 야외에서 사람들이 나팔꽃과 가장 많이 혼동하는 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메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우리 자생화로, 잎 모양이 나팔꽃과 확연히 다릅니다. 또한 나팔꽃이 화려한 색을 뽐내는 일년생 식물인 반면, 메꽃은 은은한 연분홍색 단색을 띠는 다년생 식물입니다.

메꽃은 본격적인 여름꽃들이 피어나기 전인 5월부터 한여름인 8월까지 꾸준히 꽃을 피우며 깔때기 모양의 통꽃으로 벌과 나비에게 소중한 꿀을 제공합니다. 꽃이 진 자리에는 둥근 열매(삭과)가 맺히지만 씨앗 결실률이 낮아, 주로 땅속줄기(지하경)를 뻗으며 번성합니다.

이 메꽃의 ‘메’에는 ‘밥’이라는 뜻 외에도, 실제로 배고픈 시절 구황식물(救荒植物)로서 백성들의 밥이 되어주었던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조선 명종 때 기근으로 굶주리는 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발간된 『구황촬요(救荒撮要)』에도 메꽃의 뿌리가 등장합니다.

봄철 춘궁기에 양식이 떨어지면 서민들은 들판으로 나가 메꽃 줄기를 걷어내고 땅을 깊이 파내려갔습니다. 그러면 하얗고 길쭉한 땅속줄기가 나왔는데, 이를 캐다 찌거나 삶아 먹으면 밤이나 고구마처럼 들큼한 맛이 났습니다. 녹말 성분이 풍부해 배고픈 시절 한 끼 식사로 훌륭한 대안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봄에 돋아나는 어린순 역시 쓴맛이 없고 부드러워 나물로 무쳐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 등 서민들의 귀한 찬거리가 되었습니다.

민간과 전통 의학에서는 몸을 다스리는 귀한 약재로도 쓰였습니다. 한방에서는 메꽃을 ‘선화(旋花)’, 그 뿌리를 ‘선화근(旋花根)’이라 부릅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메꽃은 기운을 돋우고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며, 얼굴의 기미와 주근깨를 없애는 등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합니다. 현대의학에서도 메꽃 뿌리가 면역력 증진, 피로 해소, 이뇨 작용, 혈압 강하 등에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메꽃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동서양의 시선이 흥미롭게 교차합니다. 영어로는 다른 잡초를 감고 올라간다는 뜻에서 ‘바인위드(Bindweed)’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덩굴이 나선형으로 돌며 피어난다고 하여 ‘선화(旋花)’라고 부릅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낮에 활짝 피어있는 꽃이라 하여 ‘히루가오(晝顔, 낮의 얼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침에 피었다 지는 나팔꽃인 ‘아사가오(朝顔, 아침의 얼굴)’와 대비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릴 적 제 고향 안동에서는 이 메꽃을 ‘모메꽃’이라 불렀습니다. 마침 같은 고향 출신인 이육사 시인의 시 「초가(草家)」에도 이 ‘모메꽃’이라는 정겨운 표현이 등장하여 붙여봅니다.

   수묵화 같은 동리 앞 보리밭에 
   나물 캐러 간 가시내는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두 뺨 위에 ‘모메꽃’이 피었다.

나물을 캐러 갔지만 종달새 노래에 취해 빈 바구니로 돌아오는 시골 처녀의 부끄러워 발그레해진 볼을 연분홍빛 메꽃에 비유한 대목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육사 시인(李源祿,1904~1944)의 고향인 안동 도산면 원촌마을 안동 문학길에는 이 시와 ‘청포도’ 시를 기려 ‘모메꽃길’ 과 ‘청포도길‘ 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2026. 06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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