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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예로부터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자기가 사는 마을의 이름을 지었고, 산, 강, 바위, 호수의 이름을 지었으며, 짐승과 새와 나무, 풀, 꽃들에도 이름을 지어 주고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이름 중에는 한두 가지씩 그럴듯한 전설이 만들어져 전승되고 있는데, 특히 아름다운 새와 꽃 등 생물(生物)에 깃든 전설은 대부분 원한(怨恨)을 품고 죽은 인간의 슬픈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만, '원한(怨恨)'이라고 우리는 관용적으로 붙여서 사용하는데, 원(怨)과 한(恨)은 엄연히 다릅니다. '원(원수)은 갚는다.'고 표현하고, '한은 푼다.'고 말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춘향전』을 예로 들어, 수청을 거부하여 옥에 갇힌 춘향의 경우, 변 사또에 대한 감정은 怨(원)이고, 기다리고 있는 이 도령에 대한 그리움은 恨(한)이라고 합니다.
하지(夏至)와 소서(小暑) 사이 이맘때쯤, 시골길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하얀 도라지 밭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차를 세우고 홀린 듯 밭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몇 장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떠났던 기억이 있는데, 이 도라지에도 한(恨)을 품은 슬픈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옛날 금강산(金剛山) 옥류동에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도씨 노인과 예쁘고 효성이 지극한 '라지'라는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비로 빌려 쓴 부잣집 돈을 갚을 수가 없어서, 그 딸이 부잣집 후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라지는 팔려가는 날 마지막으로 어머니 산소를 찾아뵙고, 많은 생각에 잠겨 옆 벼랑으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가엾이 여겨 라지를 어머니 무덤 옆에 묻어 주었습니다. 이듬해 그 무덤에서 어떤 싹이 돋아나더니 슬플 정도로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 피어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필시 라지의 혼(魂)이라고 여겨 도씨 처녀의 이름을 붙여 '도라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도라지는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중국,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 분포하는데, 한반도가 분포의 중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외 지역에서도 분포하지만, 야생초로 분류되거나 화초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연 상태의 도라지는 보라색 꽃이 많고 흰색은 드물지만, 재배 도라지는 흰색이 대부분입니다. 재배지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간 흰 도라지도 있고, 교잡으로 보라색 꽃의 재배용 도라지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 구분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요의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에서 백도라지를 도라지꽃의 색깔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도라지의 생태 특성과는 다소 부합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라지는 더덕과 함께 초롱꽃목 도라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으로, 키는 어른의 허리까지 자라며 산과 들 양지바른 곳에서 자랍니다. 뿌리는 굵고 줄기는 곧게 자랍니다. 줄기를 자르면 흰색 즙이 나오며, 꽃은 7~8월에 보라색 또는 흰색으로 핍니다. 도라지는 다소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암벽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낼 만큼 열과 건조에 강한 식물입니다.
도라지와 더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 산채 요리와 전통 약재로 이용하는 민족 식물 자원입니다. 재배하는 도라지는 2~3년생 뿌리를 사용하며, 6년생 이상을 약재로 취급하는데, 가을에서 초봄, 특히 초봄의 도라지가 약효가 좋고 맛과 향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때가 도라지의 쓴맛이 가장 강한 시기입니다.
도라지의 한글명 유래에 대한 슬픈 전설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김종원 교수의 『한국식물생태보감』에서는 '돌(石)밭에서 나는 것'이라고 해서 '돌것'이라 했으며, 이것이 돌갓 → 도랏 → 도라지로 변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경상도에서는 지금도 '돌개'라고 부릅니다.
도라지의 중국명은 '길경(桔梗)'이며, 한방에서도 길경이라고 씁니다. 일본에서는 '기쿄우(キキョウ, 桔梗)'로 한자명을 일본어로 음독(音讀)하고 있으며, 일본 민간에서는 도라지를 '오카도도키'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오카'는 언덕(丘)을 뜻하는 일본말이고 '도도키'는 우리말 '더덕'에서 유래했다는 데 이론(異論)이 없습니다. 즉 일본 사람들은 도라지를 '언덕에 나는 더덕'으로 보고 있는 셈입니다.

영어명은 '벌룬 플라워(Balloon Flower)', 곧 '풍선 꽃'이라는 의미인데, 꽃이 피기 전에 꽃봉오리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데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새삼 어릴 때 도라지밭에서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를 장난삼아 '빵빵' 터트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혹자(或者)들은 지금도 10년 넘은 도라지는 어설픈 인삼보다 훨씬 낫다고 합니다. 인삼의 유효 성분인 사포닌이 도라지 뿌리에도 많이 들어 있는데, 도라지가 오래될수록 이 사포닌 함량이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문헌 기록 중에는 1433년(세종 15년)에 편찬된 의학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도라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맛이 맵고 온화하며, 독이 약간 있다. 햇볕에 말린 것은 인후통을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성질이 약간 차고 맛은 맵고 쓰며, 약간 독이 있다. 목, 허파, 코, 가슴의 병을 다스리고 벌레의 독을 내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방(韓方)에서 길경(도라지)은 소염진통, 진해거담제로 폐나 기관지에 좋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개발된 '용각산'도 길경(도라지)을 주요 성분 중 하나로 사용하는데, 감초·행인(살구씨)·세네가와 함께 목의 염증을 진정시키고 가래를 삭히는 데 쓰입니다.

도라지를 요리하려면, 손질 후 1~2일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내고 독성을 완화시키며 섬유질을 부드럽게 한 뒤 요리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요즘 시중에서 구입하는 깐 도라지나 식당에서 나오는 도라지의 상당 부분이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나라에서 식재료 수입 시 위생 관리를 하고 있다고는 하나, 표백제 처리를 한 중국산 깐 도라지가 적잖이 유통되고 있다 하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도라지도 껍질을 벗겨 놓으면 사과처럼 갈변(褐變)이 되는데, 상품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아황산나트륨으로 표백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아황산나트륨은 특히 천식 환자에게 과민성 반응으로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이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식재료를 구입할 때 중국산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시장에서 산 깐 도라지가 지나치게 깨끗하고 흰색이라면 표백 처리를 의심하고, 흐르는 물에 충분히 씻은 뒤 요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라지는 사람에 따라 소화력을 저하시키는 경향이 있어, 소화력이 약한 분은 많이 드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돼지고기의 지방 성분이 도라지의 유효 성분인 사포닌을 제거하는 작용을 하므로, 돼지고기와 도라지는 함께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요즘 '장생도라지'라는 상표명으로 도라지를 고급 약재로 판매하는 광고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2~3년이면 캐는 일반 도라지와 달리, 판매자의 설명에 따르면 사포닌 등 유효 성분이 21년 근일 때 최고점에 이르기 때문에 21년 근 도라지를 판매한다는 것이었는데, 공인된 임상 결과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엷게 받쳐 입은 보랏빛 고운 적삼
찬 이슬 머금은 수줍은 몸짓
사랑의 순한 눈길 안으로 모아
가만히 떠 올린 동그란 미소
눈물 고여 오는 세월일지라도
너처럼 유순히 기도하며 살고 싶다.
이해인 수녀의 「도라지꽃」 시 중에서 일부입니다.
(2026. 07 - 국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