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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石榴)나무

 



   밤이 지나고 햇살이 부실 때, 
   빨간 알알이 석류는 붉는데,

   차가운 별 아래 웃음이 지면서, 
   메마른 가지에 석류 한 송이 
   가을은 외로운 석류의 계절 

가수 문주란(1949~ )씨가 부른 노래 「석류의 계절」의 일부입니다. 노래의 정서처럼 깊어 가는 이 가을, 남쪽 지방에서는 잘 익은 석류를 따는 계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석류는 과육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알갱이를 품고 있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의 전통 혼례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도 석류 문양·포도 문양·동자 문양이 즐겨 쓰였습니다. 석류나 포도처럼 자손을 많이 낳고, 동자처럼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기복적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萬綠叢中紅一點(만록총중홍일점)' 

중국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은 석류를 노래한 시에서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핀 한 송이 붉은 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홍일점(紅一點)'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원래는 온통 푸른 잎 속에 핀 붉은 석류꽃 한 송이를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훗날 많은 ‘남성 속에 섞인 한 여인’ 을 이르는 말로 뜻이 옮아간 것입니다.

군(軍)에서 쓰는 살상용 수류탄(手榴彈)의 '류(榴)' 자도 석류 '류(榴)' 자입니다. 모양이 석류를 닮았고, 손(手)에 쥐고 던질 수 있으며, 파편 알갱이가 석류 속 알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수류탄의 영어 'Grenade'도 스페인어로 석류를 뜻하는 Granad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Granada)'라는 지명의 어원과 상징 역시 석류입니다. 실제로 스페인 그라나다에 가보면 곳곳의 공공건물과 기물에서 석류 문양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어로는 수류탄도, 석류도, 지명 그라나다도 모두 Granada로 통합니다.

 


『성경』「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아담에게 건넨 금단의 열매가 사과가 아니라 석류였다는 설(說)도 전해집니다.

사실 선악과가 사과라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원문에는 그저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 라고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4세기 라틴어 성경에서 악(惡)을 뜻하는 단어와 '사과' 를 뜻하는 단어의 철자가 우연히 ‘malum’ 으로 같은데서 '선악과 = 사과' 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남자의 목에 튀어나온 연골을 '아담의 사과(Adam's Apple)' 라는 표현을 존 밀턴이『실낙원』에서 하게 되면서, 사과라고 하는 의미가 더욱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정작 중세 아랍의 의학자들은 같은 부위를 '사과'가 아니라 '석류'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선악과가 사과보다 석류일 가능성이 더 유력하다고 보는 근거가 또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지금도 석류를 'Apple of Granada (그라나다의 사과)' 라고 부르고 있어, 애초에 석류를 사과로 옮겼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덴동산의 배경으로 꼽히는 고대 지중해 동안(東岸)의 레반트(Levant) 지역은 석류의 원산지이자 자생지이며,『구약성경』에서도 석류는 풍요와 축복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지리적·식물학적·상징적 정황을 종합하면, 석류설이 사과설보다 정합성에서 앞선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석류의 원산지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지역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온 과실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석류 껍질이 발견되며, 『성경』에 등장하는 '여리고성' 터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석류 껍질이 나왔다고 합니다.

'석류(石榴)'라는 이름은 한중일이 함께 써 온 말입니다. 중국 한나라 때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유명한 장건(張騫)이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포도·무화과와 함께 석류를 들여왔는데, 당시 그 지역을 한자로 안석국(安石國)이라 표기했기에 안석국에서 온 석류라는 뜻으로 '안석류(安石榴)'라 부르다가 석류라고 줄여서 불렀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석류는 독특한 열매 모양과 아름다운 꽃 덕분에 중국 전역에 퍼졌고, 정원이나 담장 밑에 관상용으로 즐겨 심어졌으며, 수많은 시인이 시가(詩歌)의 소재로 애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석류는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신라 때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당초문(唐草紋)에 석류 문양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7세기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사』 의종 5년(1151년)에 처음 안석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전하며, 조선 초기까지도 '안석류'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구전되면서 중국과 같이 편의상 '석류'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석류나무는 부처꽃과(科)에 속하는 낙엽 활엽 소교목으로, 높이는 4~5m 정도입니다. 5~6월에 가지 끝에 몇 송이씩 빨간 꽃이 피고, 9~10월이면 지름 6~8cm 정도의 둥글고 붉은 열매가 장과(漿果)로 익습니다. 잘 익어 껍질이 벌어지면 루비 보석 같은 알갱이가 삐죽삐죽 드러나는데, 그 자태와 향기가 여간 탐스럽지 않습니다.

석류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노지 월동이 어렵고, 경상북도 중부와 전라북도 북부를 잇는 선이 노지 월동의 북방 한계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 석류는 아직 국가 통계상 생산량이 따로 집계되지 않을 만큼 재배 규모가 크지 않은데, 주산지인 전남 고흥이 국내 생산의 70~80%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전남·경남 해안지역으로 재배가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내 생산만으로는 수요를 채우지 못해 이란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매년 수천 톤 규모를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흥 석류는 '대한민국 지리적 표시제' 등록 품목이기도 합니다.

석류 열매는 얇은 칸막이로 나뉜 여섯 개의 작은 방마다 수많은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새콤달콤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있어 그냥 먹기도 하고 청량음료의 재료로도 쓰이는데, 단맛이 도는 단석류와 신맛이 강한 신석류 두 종류로 크게 나뉩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석류는 대부분 신석류이고, 이란 등 중동에서 약재용·주스용으로 수입되는 석류는 대체로 단석류입니다.

 


예전에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라는 노랫말과 함께 석류 음료 광고가 큰 인기를 끌면서 석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적이 있습니다. 석류는 여성 호르몬과 유사한 성분인 에스트로겐이 풍부하여 여성의 과일로 불리며, 갱년기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나라 양귀비는 여지(리츠)와 석류 두 과일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여지는 남방 과일이라 남쪽 지방에서 진상 받아먹었고, 석류는 양귀비가 머물던 장안(지금의 산시성 시안) 인근에서 재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시안의 여산(驪山) 자락에는 석류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에는 석류가 목 건강에 좋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날 때, 또는 목이 쉬거나 부었을 때 석류를 먹으면 좋다고 전합니다. 석류 껍질인 석류피(石榴皮)는 예로부터 좋은 약재로 쓰여, 설사나 이질에 효과가 있고 구충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말린 석류 껍질을 달여 마시면 도움이 된다고도 합니다. 새콤달콤한 석류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절로 고입니다.

석류는 다산의 의미와 함께 음양(陰陽)의 상징성도 지니고 있어,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두루 쓰였습니다. 조선시대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唐衣), 비녀머리를 석류꽃 모양으로 새긴 석류잠(石榴簪), 왕비의 대례복, 안방 가구, 도자기, 병풍 등에 석류 문양이 단골로 들어갔고, 여인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는 석류 그림을 걸어두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습니다.

   고향 고향 내 고향, 박꽃 피는 내 고향 
   담 밑에 석류 익는 아름다운 내 고향 

'박꽃'과 '석류'로 고향집의 서정을 그려낸 「고향」이라는 동요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로, 담장 밑에 붉게 익어가는 석류와 하얗게 핀 박꽃이 어우러진 고향집풍경이 짧은 가락 속에 정겹게 담겨 있습니다. 오랫동안「고향의 봄」을 작사한 이원수 작사로 잘 못 알려졌는데, 원작자는 김원룡 시인이며, 작곡가는 정세문 작곡으로 밝혀졌습니다. 

(2026. 09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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