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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木花)꽃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세라고 합니다. 이 평균 수명에 비해 보면 독보적으로 장수한 왕은 81세까지 산 영조대왕(英祖大王)입니다. 재위 기간도 51년 6개월로 최장 기록입니다.
영조대왕의 첫 번째 중전이었던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759년(영조 35년) 겨우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의 새로운 중전으로 간택된 인물이 바로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비운의 단종의 비 송현수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와는 다른 사람이며 한자도 다릅니다.
목화(木花) 이야기를 정순왕후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15세에 중전으로 간택된 그녀의 영민함이 목화에 얽힌 일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왕비 간택은 내명부의 수장인 대왕대비나 대비가 주관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영조 임금보다 항렬이 높은 내명부의 수장이 없었고, 그다음 서열인 며느리 혜경궁 홍씨가 있었지만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배필감을 면접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세 명의 규수 중 한 명을 뽑는 삼간택에는 영조가 직접 나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직접 통명전에 나가 엄격하게 간택을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야사(野史)인 『대동기문』 등에는 영조대왕과 영민하고 대담했던 열다섯 살의 정순왕후가 면접 자리에서 주고받은 대화가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간택에서 정순왕후가 영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먼저 세 명의 규수가 누구의 딸인지 알아보기 위해 방석에 각자 아버지의 함자를 새겨 두었는데, 다른 후보들은 그 방석에 그대로 앉았지만 정순왕후만은 방석을 비켜 앉았습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정순왕후는 대담하게 “자식으로서 아버님 함자가 적힌 방석을 어찌 밟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조는 내심 ‘이것 봐라, 플러스 10점……’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른 규수들이 “동해 바닷속입니다.”, “구천(땅속)이 가장 깊습니다.” 라고 답할 때, 정순왕후는 “사람의 인심(人心)입니다. 바다의 깊이는 잴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속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영조는 또 한 번 ‘아하, 플러스 10점……’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 고 묻자 다른 규수들은 “모란입니다”, “양귀비입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다른 꽃은 잠깐의 눈요기에 지나지 않지만, 목화꽃은 추운 겨울에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혀 주는 솜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영조는 열다섯 소녀의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답변,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국모로서 더할 나위 없다고 판단하여 정순왕후를 낙점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아무 벼슬도 없는 유학(幼學) 신분이었던, 경주김씨 김한구의 둘째딸로 경기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가는 충남 서산에 세거하였습니다). 오라버니 김귀주(金龜柱)와 더불어, 조선 후기 혼란한 역사 속에서 영조·사도세자(장조)·정조·순조에 이르기까지 정순왕후는 영민했던 만큼 권력의 부침과 외척 간 당쟁과 복수로 얼룩진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벽파인 오빠 김귀주의 국정 농단과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관여했습니다. 영조의 죽음과 정조의 치세에서는 김귀주는 귀양 가서 죽고, 정순왕후도 죽은 듯이 살다가,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열한 살의 순조를 수렴청정하면서 정순왕후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고, 감정 많은 권력의 공수교대가 됩니다. 정순왕후와 벽파세력들은 정적이었던 남인시파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남인 시파계열의 젊은 학자들 중에 천주교인이 많다는 이유로, 1801년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남인 시파를 완전히 제거하기위한 ‘신유박해’를 가합니다. 수 백 명이 처형을 당했고, 수 천 명이 귀양을 갔습니다. 남인 시파였던 정약용의 가문도 이때 철저히 화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지만, 그 옛날 이맘때쯤이면 넓은 들, 넓은 잎 사이로 세모시 치마처럼 속이 비칠 듯 투명하고 고운 미백색 꽃이 핀 목화밭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목화 열매가 익어 마르면서 벌어지고, 새하얀 솜 송이가 새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일제히 피어날 때면 어째서 ‘나무 꽃(木花)’이라 불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고향의 풍경과 소박한 시골정서를 잘 표현한, 「사슴」으로 잘 알려진 노천명 시인(1912~1957)의 시 「고향」 첫머리입니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밤하늘에 별을 보며 사랑을 약속하던 곳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하사와 병장’이 1976년에 부른, 진남성 작사·작곡의 「목화밭」가사 일부입니다.
언젠가 마지막에는 돌아가고 싶은 곳도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이었고, ‘우리 처음 만난 곳,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고향의 목화밭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세대까지는 목화밭과 목화꽃이 삶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값싼 수입 목화나 화학솜에 밀려 우리나라 목화밭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다듬이 방망이 소리, 하얀 광목의 부드러운 질감, 겨울 솜이불의 무게감과 따뜻함, 거리의 솜틀집 등 목화와 무명, 솜에 얽힌 우리의 것들도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목화는 무궁화, 접시꽃, 부용꽃과 같은 아욱과(科)로 인도가 원산지인 한해살이 초본(草本)입니다. 다만 열대지역에서는 여러해살이 목본(木本)도 있습니다.
목화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의 옷감으로 쓰여 왔습니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 페루에서는 기원전 2500년,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500년경에 목화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목화는 열대성 작물이라 날씨가 더워야 잘 자라며, 원줄기 높이는 60~100cm 정도입니다. 7월 중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서리가 올 때까지 피고 집니다. 꽃빛은 처음에는 백색으로 피었다가 연분홍, 진분홍으로 바뀌며, 꽃 모양은 접시꽃 정도의 크기로 은은한 한지(韓紙)를 연상시키는 차분하면서도 멋스러운 꽃입니다.
9월부터 11월까지 목화를 수확합니다. 열매는 삭과로, 다섯 갈래로 터지면서 그 안의 씨앗과 씨앗을 감싼 흰 솜털이 드러나는데, 이를 뽑아 솜이나 무명천의 원료로 씁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도 목화 농사를 지었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도 목화 농사를 짓는 곳이 많았습니다. 배고프고 단(甘)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목화밭 언저리를 지나가다 열매가 여물기 전 솜다래(목화다래)를 한 움큼 따서 까먹으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났는데, 그 맛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목화는 GMO(유전자 변형 생물)의 비중이 높은 식물입니다. GMO 비중이 높은 콩으로 대두유를 많이 생산하듯이, 면화씨로는 ‘면실유’를 많이 생산합니다. 참치 캔에는 지금은 카놀라유(油菜油)를 많이 쓰지만, 초기에는 이 면실유를 사용했습니다.
목화(木花)는 면화(綿花), 목면(木綿), 초면(草綿)이라고도 불립니다. 목화는 ‘꽃처럼 흰 섬유가 피는 초목’이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고, 면화는 ‘솜꽃’이라는 뜻이며, 목면(木綿)이 시간이 흐르면서 ‘무명’으로 바뀌었다고 봅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 때(1363)입니다. 문익점(文益漸, 1329~1398)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 열 톨을 붓대 속에 몰래 가지고 들어와, 고향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 지리산 자락에서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심었습니다. 3년 만에 간신히 재배에 성공하여 급속히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단성면 배양마을은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로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인 2010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직물이 면직물로 확인되면서,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는 시점보다 800년 앞서 백제 창왕 때(567년 무렵) 이미 한반도에 목화가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목화의 전래로 우리나라 의류는 대혁명을 맞습니다. 예전에는 명주, 모시, 삼베로 옷을 지어 입고 추위에 떨며 지냈지만, 목화 재배의 성공으로 솜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목화를 다루는 면업(綿業)은 빠르게 광업, 염업(鹽業)과 함께 조선의 3대 산업이 되었습니다. 세종 때부터는 조세로 면포를 징수했고, 그 후에는 군포로도 징수했으며, 상평통보(인조 11년, 1633)가 전국 통화로 자리 잡을 때까지 면포는 화폐(貨幣)로서 기능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목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역시 중국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 가 중국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다음이 20%를 생산하는 인도이며, 이어서 브라질, 미국, 파키스탄, 호주, 우즈베키스탄, 튀르키예 등의 순입니다.
미국 흑인들 앞에서 ‘목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실례가 되며 금기시된다고 합니다. 2026년인 지금도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는 목화 채취와 관련된 강제노역이 국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다 목화 농사에 강제 노역을 시켰던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은 주로 목화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기마다 엄청난 인력 수요와 탐욕 때문에 흑인 노예의 강제노역을 오랫동안 지속했습니다.
When I was a little bitty of baby
my mama would rock me in the cradle
in them old cotton fields back home
(내가 어린 아기였을 적 엄마는 요람에 든 나를
흔들어 길러 주셨지. 고향의 오랜 목화밭에서)
1940년 미국 흑인 민요가수 리드벨리(Lead Belly)가 작곡하여 여러 사람이 커버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팝송 「Cotton Fields」의 첫머리입니다. 미국 남부의 목화밭에서 겪은 고달픈 삶조차 지금에 와서는 그립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흑인 노예해방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흑인들은 남부의 농장에서 계속 일했는데, 1950년대에 목화 수확기가 발명되면서 인력 수요가 줄어들자 일자리를 잃은 흑인들이 대거 북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흑백 간의 차별과 충돌을 낳았고, 마침내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6. 07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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