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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쌀을 영곡(靈穀)이라고 불렀는데, 쌀을 인간의 영혼과 통하는 신성한 곡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을 햇살에, 들녘의 황금빛이 눈부십니다. ‘황금들판’이란 표현이 좀 식상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가을 들판에 적합한 더 이상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중, 고등시절, 고향집 뒷동산에 올라, 골골이 저녁밥 연기가 나지막이 깔리는 언덕 넘어, 낙동강 굽이 따라 눈길이 닿는 곳까지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을 내려 보는 것이 너무 좋았고, 평화로워서, 가능한 가을날은 매일 올랐습니다.
올해 농사도 풍년이라고 합니다. 잦은 홍수에 피해를 본 농민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출장길에서 만난 당진평야도, 김포평야도 벼농사는 대풍인 것 같습니다.


옛날 같으면 지금 쯤 각 방송에서 연일 ‘풍년이다’ ‘대풍이다’ ‘쌀 생산이 몇 천만석이 예상된다.’ 라고 매일 뉴스로 나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 쌀밥 못 먹는 사람이 거의 없고,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 되니까, 공기나 물과 같이 쌀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풍년에 대한 감흥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벼는 세계 100여 개 국(國)에서 재배 되고 있는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가 90%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벼(조곡) 기준 우리의 생산량은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500만 톤으로, 대략 8억 톤을 생산하는 세계 생산의 0.6%를 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27%로 1위, 인도가 25%로 2위, 그 다음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베트남 순입니다. 일본은 연간 우리의 대략 2배인 1천 만 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벼(조곡) 생산 500만 톤은 쌀(정곡)로 하면 376만 톤인데, 2023년 우리 쌀 소비량이 367만 톤이었으니까, 2023년 한해만도 9만 톤 정도가 재고로 추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인당 쌀 소비량은 1985년 연간 113kg이였는데, 40년 후인 2024년에는 56kg으로 반으로 줄었습니다. 이를 인당 1일 쌀 소비량으로 계산하면, 155g입니다. 밥 한 공기가 대략 100g 정도인데, 결국 우리 국민 한사람이 하루에 밥 한 공기 반 정도를 먹습니다. 요즘 쌀값이 많이 올라서 20kg에 6만5천 원 정도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하루 먹는 1공기 반의 쌀값으로 계산하면 500원 정도 나옵니다. 요즘 껌 한통이 1,200원 이라고 보면, 하루 우리가 먹는 쌀값이 껌 반통 값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식 생활에서 보면, 소득증가에 따라서 처음에는 곡류의 소비가 증가하다가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이 넘어서면 곡물소비가 감소하고 육류의 소비가 늘어나게 되고, 소득수준이 더 높아지면 육류도 감소하고, 과일, 야채 등 신선식품의 소비가 증가하게 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를 경계로 곡류보다는 육류소비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인구 10%정도, 즉 8억 명이 기아상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먹는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먹는 옥수수 등 사료를 동물에게 먹입니다. 만약 중국인과 인도인이 소득증가로 육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면, 이들의 육류생산을 위한 옥수수 등을 사료로 세계시장에서 쓸어갈 것이 예상되어,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의 기아는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연간 쌀 소비량과 비슷한 량의 옥수수를 주로 사료용으로 매년 수입하고 있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약 5천 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사료용으로 수입하여 닭이나 돼지 등에게 먹이고 있습니다.
벼의 기원은, 지금까지는 중국 황하유역인 하북(河北)지방에서 발견된 볍씨가 1만5백 년 전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만, 1994년 청주에서 구석기 유물과 함께 「소로리 볍씨」 36톨이 발굴되었는데, 서울대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과 미국 ‘지오크론 연구실(Geochron Lab.)’의 조사결과 1만5천~1만7천 년 전 연대 값이 나와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03년10월22일 영국 BBC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가 한국의 소로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고 보도 했으며, 2015년 ‘소로리 볍씨와 생명문화 청주’ 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소로리 볍씨」를 세계최고(最古)의 볍씨로 공인했습니다.
벼 재배는, 중국 양자강 유역에서 8~9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벼가 인도로 넘어가서 갠지스강 유역에서 4천 년 전에 벼를 재배했다고 합니다.
벼 종류는 크게 구분하여, 동북아시아 중심의 찰진 쌀의 자포니카 (Japonica) 종과 동남아와 인도 등 열대 중심의 안남미의 인디카 (Indica) 종으로 나눕니다. 현재, 우리 국내에서 재배되는 쌀 품종은 모두 밥맛이 좋고 찰진, 자포니카 종인데 국내개발 품종으로 삼광, 오대, 신동진, 진상 등이 있고, 일본에서 도입한 품종으로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아키바레 등이 있습니다.
쌀과 관련된 우리말 어원은, 고대 인도어로 쌀을 칭하던 ‘사리’ 가 우리나라에서 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벼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로 ‘바디’, ‘파디’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말 ’벼‘가 나왔고, 영어의 논(畓) ’paddy' 가 나왔다고 합니다. 밥이라는 말은 중국어 반(飯)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지금도 햅쌀밥을 ‘햇반’ 이라고 합니다. 또, 벼 알곡을 말하는 ‘나락’ 은 낱알이 나달, 나락으로 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벼는 벼과(화본과)로, 높이 1m정도로, 파종은 주로 못자리판을 4월 초순에, 모내기는 5월 하순~6월 초순, 개화는 7~8월인데, 바람에 의해 수분(受粉)이 되며, 수확은 10~11월에 하는 한해살이 초본(草本)입니다.
벼를 수확하면, 나락과 볏짚을 얻을 수 있으며, 나락은 도정으로 쌀과 쌀겨, 왕겨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쌀의 성분은 탄수화물 70~85%, 단백질 6.5~8.0%, 지방 1.0~2.0% 이며, 쌀 100g의 열량은 360Kcal 정도입니다. 성인의 1일 권장 칼로리는 남자 2,700Kcal, 여자 2,000Kcal라고 하니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쌀은 한자로 미(米)자를 쓰는데, 米자를 파자해 보면 八, 十, 八이 됩니다. 이는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88번의 농부 손이 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람의 연세를 이야기 할 때도 88세를 미수(米壽)라고도 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책 『한국인 이야기 - 너 어디서 왔니』의 설명을 보면 ‘우리는 쌀을 영곡(靈穀)이라고 불렀는데, 쌀을 인간의 영혼과 통하는 신성한 곡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곡인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은 정기(精氣)가 있다. 한자로 精氣를 보면 쌀 미(米)자가 둘 다 들어가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어령 교수님은 ‘젓가락 문화’ 를 설명하면서, 쌀 재배지역과 젓가락 사용지역이 일치하는 것은, 쌀과 젓가락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우리 음식 문화는 온식(溫食) 문화이므로, 뜨거운 음식을 먹기 위한 젓가락이라는 도구가 필요했으며, 찰진 쌀을 손으로 먹으면, 손과 얼굴에 달라붙어 불편합니다. 때문에, 자포니카 계통의 찰진 쌀을 먹는 나라는 예부터 젓가락을 사용했습니다. 반면, 낱알로 푸석푸석한 안남미를 먹는 나라들은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며, 손으로 꼭꼭 뭉쳐서 먹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합니다. 그래서 동남아나 인도, 방글라데시 같은 곳은 지금도 쌀밥도, 난도 손으로 먹은 곳이 많습니다. 다만, 태국이나 베트남 등은 뜨거운 쌀국수가 있기 때문에 젓가락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안남미 계통의 인디카 종 「통일벼」를 재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제 중, 고등시절 통일벼를 재배했고, 통일미 쌀밥을 한동안 먹어 봤습니다. 그 당시는 통일미다. 일반미다. 밥맛을 따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고, 쌀밥을 먹는다는 것이 좋았고, 부드러웠고, 맛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통일벼의 개발은, 당시 ‘주곡 자급’ 이라는 강력한 국가목표 아래, 쌀 증산을 위한 벼 품종 개발 프로젝트의 결과였습니다. 벼 품종개발을 주도했던 분이 서울대 농대 허문회(1927~2010)교수였습니다. 1964년부터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 와 국내를 오가는 연구 끝에, 1969년 IR667이라는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품종을 개발하고, 1971년 기적의 볍씨 「통일벼」라고 이름 붙이며,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통일벼는 재래종 벼 보다 30~40% 증산이 되었고, 1976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3천342만섬(535만 톤)을 수학하며, 우리의 영원이던 주곡 자급 원년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5천년 역사를 같이한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곡이 드디어 남아돌기 시작하자, 통일벼는 밥맛이 덜하다는 이유로 빠르게 퇴출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쌀밥을 ‘이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 역사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 권문세족에게서 토지를 몰수하여 정전법(井田法) 즉, 그간 권문세족에게 생산량의 반 이상을 수탈당했던 것을 우물 井자로 9등분 하여 생산량의 1등분만 국가에 세금내고, 8등분은 경작농민들이 가질 수 있게 함으로서, 농민들도 드디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쌀밥을 ‘이성계가 주는 밥’ 이라고 해서 ‘이밥’ 으로 널리 부르게 했습니다.
600여 년 전, 삼봉이 민심 선무(宣撫)를 의도한 정치적인 ‘이밥’이란 단어가 지금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밥이 하늘이다.’ ‘밥이 보약이다.’ ‘밥 버리면 죄 받는다.’ 는 등 우리의 선조들은 밥에 대해서는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 왔습니다. 지금은 특별한 밥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어릴 때, 밥알 하나라도 흘리면, 이상하게도 제가 잘 못 한 것 이상으로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 때는 참 억울했었는데.......
쌀 한 톨, 보리 한 톨은 영혼과 통하는 영곡(靈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 민족정서를 관통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2025. 09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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