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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로수 은행나무가 1년에 한 번 주어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이나 하듯이 노란 단풍으로 노랗게 물들고 있습니다.
나뭇잎에 단풍이 물드는 것은, 가을이 되면 나무는 자라는 것을 멈추고 겨울을 준비합니다. 잎에서는 더 이상 영양분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되고, 나무에서는 수분과 영양분이 잎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어,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코르크 같은 떨켜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잎에 초록색을 유지했던 엽록소가 점점 파괴되면서 빨강, 노랑 등으로 단풍이 듭니다. 붉은빛을 띠는 색소 ‘안토시아닌’ 과 노란빛을 띠는 ‘크산토필’ 의 화학작용이 원인입니다. 밤낮의 기온 차가 크면 클수록 화학작용이 강하므로 늦가을 단풍이 더 울긋불긋 절정이 됩니다.
단풍(丹楓)의 사전적 의미는 ‘가을에 나뭇잎의 빛깔이 변화하는 현상’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붉을 단(丹)자에 단풍나무 풍(楓)자로 즉, 붉은 단풍나무를 의미합니다. 붉게 물들지 않는, 예를 들어 은행나무, 자작나무, 낙엽송 등은 노랗게 물들지만 역시 단풍이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것 따지지 말라는 옛사람들의 여유로 보입니다.

몇 년 전 가을에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단풍을 보러 갔었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통일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울분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적어도 1100년 이상의 나이에, 높이 42m, 밑둥 둘레가 14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조선 세종대왕으로부터 당상관(정3품) 품계를 받았으며,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의 일부입니다.
대추 한 알이 붉어지는데도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들어있다.
천 년 이상 세월을 살아낸 용문사 은행나무에는 얼마나 많은 영욕의 역사와 사연과 곡절이 숨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행나무는 은 ‘은(銀)’ 자에 살구 ‘행(杏)’ 자를 씁니다. 즉, ‘은빛 살구’ 라는 뜻인데, 은행 열매가 작은 살구를 닮았고, 열매 표면에 은빛 흰 가루 같은 것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은행나무를 ‘실버 에이프리컷(Silver Apricot)’ 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쓰는 은행(銀杏)나무를 그대로 영역(英譯)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Silver(은-銀), Apricot(살구-杏)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은행나무 한자 뜻을 대놓고 그대로 컨닝을 한 것입니다.
동북아 3국에서 은행나무와 은행을 부르는 이름을 보면, 한국만 열매와 나무를 ‘은행(銀杏)’ 이라고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은행열매는 긴낭(銀杏), 인~싱(銀杏) 이라고 은행을 자기나라 발음으로 하고 있는데, 은행나무는 일본에서는 잎이 아름답다는 의미로 이쪼(一葉)라고 말하며, 중국에서는 은행잎 중간이 갈라진 모양이 오리발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압각수(鴨脚樹) 또는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고 그 손자가 열매를 취한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 고루 분포하고 있고, 각국이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어서 원산지를 특정하기 어려웠습니다. 20여 년 전 양자강 하류 절강성 천목산맥 해발 2000m 지점에서 은행나무 자생 군락지가 발견되면서, 중국이 원산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화석으로 발견되는 1억 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생물종의 하나입니다. 은행나무가 이렇게 오랫동안 종을 유지하고 수령 천년 넘도록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온도에 대한 적응력과 환경 인자에 강하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나라 가로수를 보면 벚나무가 가장 많고, 은행나무가 다음으로 많이 식재되었습니다. 은행나무는 공해와 병충해에 강하며,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가을의 백미(白眉)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가로수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은행나무는 가로수로 다 좋은데 딱 하나 열매 냄새가 문제가 되어서 요즘은 은행나무가 많이 감소하고 있고, 꽃이 예쁜 이팝나무, 수형이 좋은 회화나무, 친근하고 운치가 있는 소나무가 많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습니다. 은행 열매가 필요한 곳에는 암나무를 심고, 열매의 냄새를 피하고 가을의 단풍을 취하고 싶은 곳에는 수나무를 심으면 되는데, 은행나무는 심고서 20년~30년은 지나야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어야 암수가 구별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최근 <산림과학원> 에서 은행나무 수나무에만 있는 유전자를 발견하여 1년 이하 묘목도 암수 구별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은행의 열매껍질에는 고약한 냄새의 ‘은행산(銀杏酸)’ 이 있고, ‘빌로볼(Bilobol)’이라는 점액질의 독성 물질이 있습니다. 은행 알을 상업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야 기계로 탈피, 탈각을 하겠지만 소량을 주워서 어떻게 해 보려면 요즘 아파트에서는 냄새 때문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래전 추석 때 산소 주위에서 은행나무 열매를 꽤 많이 주워 와서 비닐봉지에 넣고 몇 겹으로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게 밀봉해서 베란다에 2주간 두었다가 화장실에서 빨리 씻어서 알맹이만 골라내었습니다. 여러 번 씻어도 그래도 냄새는 좀 났습니다. 그런데 은행 열매껍질을 맨손으로 씻었다가 하루 지나 자 독성 때문에 손 피부가 한 겹 벗겨지는 고생을 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렵지만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화도 ‘전등사’ 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원래 암나무였는데, 조선시대 불교 탄압의 수단으로 가혹한 은행 알 공출이 있었습니다. 부과된 양을 채우기 위해서 젊은 스님들의 고충이 컸다고 합니다. 이에 고승 한 분이 이 은행나무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더니 나무가 수나무로 변해서 그 후로는 전등사에서 은행 알 공출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또, 성균관 옆 문묘 안에 큰 은행나무 4그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500년 이상 장수하는 은행나무는 대부분 암나무인데, 이 4그루는 모두 수나무입니다. 이것도 원래는 모두 암나무로 은행이 달리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돌팔매로 시끄럽게 열매를 따고, 은행 열매의 고약한 냄새로 성균관의 면학 분위기를 흐린다고, 고사를 지내 수나무로 바꾸어서 지금에 이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은행나무는 현재 23그루가 천연기념물로 <국가유산청>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수령이 천년이 넘는 것도 3그루나 있습니다. 1100년 이상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고, 강원도 영월에 1100년으로 추정하는, 충남 금산에 10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수령이 있는 은행나무에는 특이하게 곁가지에서 땅으로 향하는 긴 돌기 모양이 자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과 같이 온난 다습한 기후에서 더 많이 생깁니다. 이것을 젖 모양이라고 유주(乳株)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젖(乳)을 ‘찌찌’ 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은행나무를 ‘찌찌노끼(乳の木)’라고도 합니다.
우리 민간 신앙에는 노거수도 중요한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 은행나무 유주는 산부가 젖이 부족할 때 여기에 치성을 드리기도 했고, 이를 남성 상징으로 생각하여 유주에 기도를 올리면 아기를 얻는다는 미신과 심지어 이것을 잘라 삶아 먹으면 남자의 정력이 좋아진다는 헛소문이 있어서 실제로 유주가 잘려진 은행나무가 가끔 보입니다.
은행나무 열매는 한방에서는 백과(白果)라고 하는데, 은행나무에도 여러 가지 약효가 있습니다.『동의보감』에서는 ‘은행은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있다. 폐와 위의 탁한 기를 맑게 하며 숨찬 것과 기침을 멎게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은행나무 열매보다 잎의 약효가 밝혀져 생약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은행잎에 있는 ‘플라보노이드’와 ‘징코플라톤’ 이라는 성분이 순환기와 호흡기에 유용한 것으로 확인되어 신약 개발에 들어가 있습니다.
공자(孔子;BC551~BC479)는 은행나무 아래인 행단(杏亶)에서 학문을 닦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찰이나 향교, 서원 등 무엇인가를 정진해야 하는 곳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공자의 행단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2025.11 - 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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